이 서원은 1613년(광해군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후 1700년 (숙종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 배 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5)년에 훼철 되었으며, 1967년 옛터 서쪽에 복원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행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도곡재사를 옛터에 서원을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승덕사, 8칸의 흥교당, 6칸의 극복재, 6칸의 경서재, 유도문, 12칸의 주소, 협문 등이 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이현보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흥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 되며 동쪽 협실은 재임과 별유사의 방으로,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재와 경서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정문인 유도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 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현보 선생(1467, 세조13∼1555, 명종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 이며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설빈옹으로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 38세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후 중종반정으로 지평 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 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 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 선 생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선생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 농암가>,<생일가>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해지며 시호는 효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