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은 중종 때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1479∼1544)선생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건립한 가옥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한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의 거두였으며 예조판서였던 김상헌(金尙憲)선생이 청(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1643년(인조 21) 중건하고 청을 멀리한다는 의미로 당호를 붙였다 한다.
좌,우익사를 중층으로 꾸미고 몸채부분은 기단을 높게 조성한 후 단층으로 앉힌 다락집형상의 ′ㄷ′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다. 몸채부분은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퇴칸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이며 특히 몸채대청을 전면에 2자정도 폭으로 한단 낮게 마루를 2단으로 구성시킨 점이 눈에 띤다.
좌,우익사 루마루는 내측으로 궁판에 풍혈을 둔 난간을 세워 개방시키고 정,측면은 판벽에 판장문을 달아 폐쇄시켰으며 루하부 전면칸에 고간을 두고 뒷쪽은 아궁이를 설치했다.
정면 원주상부에는 길고 날카로운 살미를 끼우고 주두를 얹고 내측으로 보아지를 두어 대량을 받게 하였다. 도리방향으로는 창방없이 공아를 만들어 장혀와 처마도리를 받게한 이색적인 기법을 구사하였고 익사부분은 본채부분과 달리 창방을 보내고 살미와 보아지를 넣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익사 충량은 판대공을 관통시켜고 충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접시받침을 넣은 후 외기를 받도록 하였다.
중층과 단층을 합성한 평면구성과 세부기법이 주목된다.
안동시내에서 하회마을 방면으로 가다가 풍산 안교4거리에서 1km 정도(30분 정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