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안동의 인물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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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안동의 인물

안동의 인물

이현보

분류 :
문화 > 인물
상세설명

자원설명

조선 중종때 문장가인 공의 자는 비중, 호는 농암이오, 시호는 효절공이며 본관은 영천이다. 흠공의 아들로 1467년에 태어나서 29세에 진사에 뽑히고 1498년 3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에 들어가 사관을 거쳐 정언에 있을때 서연관의 실행에 논박하다가 안동에 귀양갔다. 중종반정후 지평으로 복직되어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굳고 곧아서 소란되지 않으니 동료간에 소주도병이라 불렸으니 외면은 거므스름 하나 내면은 청렴하다는 뜻이었다.
말양, 안동의 부사와 충주, 성주의 목사를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인재양성에 힘썼다.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을 역임하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은퇴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온천욕을 핑계하고 귀향하였다. 이때 도성에 영의정이하 고우들이 나와서 환송하니 그 행렬이 도문에서 제천경까지 뻗혀 보내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의 차마가 고금에 드문 성사라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명농당을 짓고 벽에 진나라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를 붙이고 한가로이 계산간에 방유하니 사람들은 그가 재상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1554년 조정에서 선행과 미덕을 표창한 일이 있어 공도 역마로 소명하였으나 이에 글을 올려 사사하였다. 공이 사는 분천은 산명수려하고 송림이 울창한 곳이다. 그 위에 부모님을 받들어 유락완상하는 곳으로 애일당을 짓고 양친 부모를 당상에 모시고 자손이 앞에 가득하고 향중에는 나이 높은 노인이 많으니 일찌기 구로회를 열어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안동임소에 있을때 크게 양로 연회를 베풀고 양친을 봉영하여 내외가 각각 주연하고 공은 자제의 예를 갖추어 술잔을 받들어 헌수하니 보는자가 감탄하였다. 1555년에 졸하니 공의 수가 89세였다. 도산 분강서원에 향사했다.

[ 농암 이현보 관련 내용]
- 농암 이현보종손가 소장문적
- 농암영정 후사본 금서대
- 농암 신도비
- 농암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