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김씨(先金)
시조는 金叔承, 신라 敬順王의 넷째아들 은열(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중시조 충열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은 경순왕의 9세손이다.
본래 寓居地는 영가지 坊里편 府西조에 檜谷村이라고 소개되는 곳으로서, "下桂谷(현재의 풍산읍 계평리)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流傳하기를 충열공의 집터라고 한다"라고 記述하고 있다.
素山에는 조선 중엽에 충열공의 11세손인 언준(彦濬)이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약 10여호가 영가김씨(永嘉, 後安東金氏)들과 혼재하여 살고 있으며, 일부는 와룡, 회곡, 문경 산양 등지에 분가하여 살고 있다.
소산은 태백산에서 연이어져 온 지맥이 크게 융기한 학가산에서부터 비롯하여 보문산, 직산을 거쳐 풍천 갈전 뒷산인 검무산을 지나 동서로 연봉을 이룬 정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정산의 기슭은 풍산들 넓은 평야로 열려있어 아주 풍광이 좋은곳이다. 선김씨의 종가가 자리잡은 곳은 정산에서 동쪽을 향하여 넓은 들과 선성이씨의 세거촌인 우렁골을 건너다보며 앉아 있다.
시조의 孫子인 利請은 안동태수를 역임하고 上洛君으로 봉해졌으며 여지승람에 안동(김씨)로 적을 받음이 공으로부터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안동의 또 다른 이름이 上洛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 또한 공으로부터이다.
忠烈公 金方慶의 父인 孝印은 예서를 잘 썻으며 벼슬은 兵部尙書·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한다. 忠烈公 金方慶(1212∼1300)은 시조 숙승의 7세손으로서 진도, 탐라 등지의 삼별초를 정벌하였고, 후에 몽고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여 모두 공을 세웠다. 정란정국공신으로서 벼슬이 시중·三重大匡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일본 정벌 후 歸京하다가 영호루에 올라 지은 (동정일본과차복주등영호루)東征日本過次福州登映湖樓 라는 시는 영호루 건립연대의 下限線을 밝혀주는 시이다. 묘우는 녹전면 죽송리에있다. 先金의 貴는 모두 이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흔은 金方慶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고, 鎭國上將軍, 都僉 議使司에 이르렀으며, 上洛公을 계승하였고, 恂은 高麗 忠烈朝에 장원급제로 출사하여 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영후(永煦)는 순의 아들로서 壁上三重大匡 僉議司事를 지냈으며 그 손자 대에 21파로 분파되었다. 오늘에는 15파가 전하고 1985년 시행한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거의 사십여만에 달한다.
안동 소산에 世居하는 집은 익원공파로서 익원공 士衡은 永煦의 손자이다.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純忠紛議佐命開國功臣이 되고 태조 원년에는 左政丞으로 제수되었다. 권근, 이무, 이회 등과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世界地圖인 혼일강 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 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하였다.
이 집안은 영가지에 보면 朝鮮 上界까지는 安東人物의 3분지 일을 차지하였고 조선에서도 가장 번성한 집안으로 꼽히었으나 中界以後로 오면서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 세가 약해 졌고, 落南이후에는 과거합격자를 거의 내지 못하였다.
단지 落南祖인 彦濬이 충좌위부사과를 지냈고, 孫子 就礪가 장예원판결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자 仁達이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한다. 이후 用秋의 문장이 뛰어나 갈문록에 실렸고, 德胤, 宗洛이 문장이 높아 문집이 전함. 특히 宗洛의 호 三素齋는 이 집안의 宗家의 당호와 동일하며 壽職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받았다.
그리고 병자호란때 의병의 선봉으로 종군한 夢麟, 夢雄 형제의 활약상이 전한다.그러나 안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壬辰亂때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金時敏, 원주목사 金悌甲, 丙子胡亂때의 金應河등이 있으며, 임시정부의 유명한 애국자 白凡 金九先生 이 집안 출신이다.
안동에 있는 이 집안의 宗家인 三素齋(1674년 건립)는 경상북도 지방민속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안동 김씨의 대종가는 아니나 낙남 이후부터 서애의 외가인 의군 점곡면 사촌의 안동 김씨(도평의공파) 집안과 번갈아 충열공의 향사를 맡아 주도적으로 지내 왔으므로 이후부터는 안동지방뿐 아니라 전국 선김의 중심적 역할을 하여 왔으며 대종회가 결성되면서 부터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특기할 점은 삼소재의 사랑은 槐堂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소산에 있는 대가들은 대문을 거의 설치하지 않고 대문이 들어설 지점에는 檜나무를 심어 그 경계로 삼았다. 이는 檜谷村 (지금 풍산읍 회곡리)의 지명과 아울러 볼 때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