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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상세설명

자원 설명

  •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金宣平, 府外·府內파로 大分
  • 조선 초에 金三近이 素山에 정착(조선후기에 크게 울린 서울 壯洞파는 16세기 초에 素山서 갈림) <永嘉誌> 坊里편 豊山縣조에 金山村이 바로 안동 김씨의 본산으로, 지금행정구역으로는 안동 풍산읍 素山洞이다.
    영가의 웅진(雄鎭)인 학가산에서 남으로 뻗은 지맥이 일으킨 井山동쪽기슭에 아늑히 안겨 기름진 풍산평야를 앞에 놓고 멀찌기 들녘 한끝을 굽이치는 낙동강줄기를 내다 보는 素山은 양명하고도 시원스런 풍광에 <ㅇ여가지>에 이른대로 좋은 생활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엔 고려개국공신 김선평의 후손과 또 다른 한 갈래의 안동 김씨인 고려 후기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 공존하고 있는데 약 250여호의 마을이 거의 김선평의 후손으로 꾸려 지고 있다.
    이 곳네거 "新안동"이라고도 일컫는 太師 김선평의 후손이 素山에 정착하기는 근조선 초에 비안현감(比安현監)을 지낸 혁(革)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본래 살던데는 安東府 南 강정촌(江亭村)으로 풍산 불정촌((지금의 下里)에 옮겨 살다가 다시 소산에 정착했다.
    시조 김선평이 고려태조 왕건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삼중대광 아부공신(三重大匡 亞父功臣)에 봉해지고, 그 아들 기(璣)가 門下侍中판도판서(判圖判書)에 손자준흥(俊興)이 門下侍中 관서안렴사에 증손 인복(仁復)이 문하평리 판전공사가(門下 評理 判典工寺事)에 오르는 등 400년 고려왕조에서 좋은 지체를 누려왔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素山에 정착한 이래의 그 대충의 내력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素山에 전거한 혁(革)의 아들 三近이 현감을 지내고,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를 지낸 三友는 종송촌(지금 풍산 上里)에 옮겨 살았으며, 三近의 맏아들 계권(係權)이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계권의 아우 계행(係行)이 도승지(都承旨)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계권의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했으니 그 맏이 世祖의 國師로 신미(信眉)와 함께 명성을 떨친 학조대사(學祖大師), 둘째 영전(永銓)이 사헌부감찰, 셋째 영추(永錘)가 수원부사, 넷째 영균(永勻)이 진사, 다섯째 영수(永銖)가 장령을 지냈다. 영수의 맏아들 영(瑛)이 참의를 지내고, 그 아래로 선조 때 기보(箕報), 肅宗때 계광(啓光)이 군수, 영조 때 양근(養根)이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영수의 셋째아들 순(珣)이 진사로 佐郞을 지내고, 그 아들 生河가 社稷令, 生溟이 進士로 學行이 있었고, 生溟의 아들 顯이 진사, 그 아들 皆宗이 진사로 군수, 계종의 아들 명원(鳴遠)이 生員·文科로 군수, 그 아우 진원(震遠)이 文科로 經歷을 지냈다.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이 길안 묵계(默溪)에 정착, 그 후손에 光海때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조행이 있었던 中淸 등이 있는데 그 후손은 묵계, 봉화등지에 世居한다.
    三友의 후손으로 아들 맹귀(孟龜), 손자 용려(用勵)가 각각 진사, 증손 시좌(時佐)가 효행으로 정려(旌閭)되고, 현손집이 군수, 그 아들이 진사였다. 시좌의 아우 시우가 생원, 그 아들 士利가 효자로 정려되었다.
    삼당(三塘) 영(瑛)의 아우 번이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내고, 그대로 서울 장동에 정착, 장동 김씨의 파조(派祖)가 되었는데, 그 후손이 크게 번영하여 그 증손 상용·상헌 형제는 절의와 문장으로 함께 빛났으며 淸陰의 손자 수흥·수항 형제는 함께 영의정을 지낸 명신이었고, 수항의 아들로, 老論四大臣의 一人이며, 학자로 역시 영의정을 지낸 창집, 그 아우 창협은 성리학의 대가로 대사간, 대사헌을 지냈고, 또 그 아우 창흡은 詩文으로, 창업은 도학·문장으로, 창나는 시문으로, 그 5형제가 가지런히 一世에 빼어나는 등 仁祖-肅宗조에 걸쳐 명신·석학·문장이 무리로 쏟아졌으며 거기에 純祖 이후 60여년에 걸쳐 나를 주름잡았던 장동김씨는 정승이 十二에 왕비를 세분이나 냈다.
    작은 집인 장동파에서 그처럼 울성하여 조선말기에 이르러는 반세기에 걸쳐 세도로 울렸으나 맏집인 여기 素山에서는 별반 그 그늘을 힘입은 바 없었다.
    소산에는 永銓의 九대손 彦行이 거처하던 돈소당(敦素堂)이 보존되고, 영전 형제들이 어버이를 효양하던 삼귀정(三龜亭), 청음이 南漢의 치욕에 은퇴하여 울분을 달래던 청원루(淸遠樓)며 <淸陰集> 판목등이 보존되고 있다.

※ 안동김씨(先金)

  • 시조는 金叔承, 신라 敬順王의 넷째아들 은열(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중시조 충열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은 경순왕의 9세손이다.

  • 본래 寓居地는 영가지 坊里편 府西조에 檜谷村이라고 소개되는 곳으로서, "下桂谷(현재의 풍산읍 계평리)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流傳하기를 충열공의 집터라고 한다"라고 記述하고 있다.
    素山에는 조선 중엽에 충열공의 11세손인 언준(彦濬)이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약 10여호가 영가김씨(永嘉, 後安東金氏)들과 혼재하여 살고 있으며, 일부는 와룡, 회곡, 문경 산양 등지에 분가하여 살고 있다.
    소산은 태백산에서 연이어져 온 지맥이 크게 융기한 학가산에서부터 비롯하여 보문산, 직산을 거쳐 풍천 갈전 뒷산인 검무산을 지나 동서로 연봉을 이룬 정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정산의 기슭은 풍산들 넓은 평야로 열려있어 아주 풍광이 좋은곳이다. 선김씨의 종가가 자리잡은 곳은 정산에서 동쪽을 향하여 넓은 들과 선성이씨의 세거촌인 우렁골을 건너다보며 앉아 있다.
    시조의 孫子인 利請은 안동태수를 역임하고 上洛君으로 봉해졌으며 여지승람에 안동(김씨)로 적을 받음이 공으로부터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안동의 또 다른 이름이 上洛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 또한 공으로부터이다.
    忠烈公 金方慶의 父인 孝印은 예서를 잘 썻으며 벼슬은 兵部尙書·翰林學士知制誥에 이르렀다 한다. 忠烈公 金方慶(1212∼1300)은 시조 숙승의 7세손으로서 진도, 탐라 등지의 삼별초를 정벌하였고, 후에 몽고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여 모두 공을 세웠다. 정란정국공신으로서 벼슬이 시중·三重大匡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일본 정벌 후 歸京하다가 영호루에 올라 지은 (동정일본과차복주등영호루)東征日本過次福州登映湖樓 라는 시는 영호루 건립연대의 下限線을 밝혀주는 시이다. 묘우는 녹전면 죽송리에있다. 先金의 貴는 모두 이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흔은 金方慶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고, 鎭國上將軍, 都僉 議使司에 이르렀으며, 上洛公을 계승하였고, 恂은 高麗 忠烈朝에 장원급제로 출사하여 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영후(永煦)는 순의 아들로서 壁上三重大匡 僉議司事를 지냈으며 그 손자 대에 21파로 분파되었다. 오늘에는 15파가 전하고 1985년 시행한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거의 사십여만에 달한다.
    안동 소산에 世居하는 집은 익원공파로서 익원공 士衡은 永煦의 손자이다.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純忠紛議佐命開國功臣이 되고 태조 원년에는 左政丞으로 제수되었다. 권근, 이무, 이회 등과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世界地圖인 혼일강 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 理歷代國都之圖)를 제작하였다.
    이 집안은 영가지에 보면 朝鮮 上界까지는 安東人物의 3분지 일을 차지하였고 조선에서도 가장 번성한 집안으로 꼽히었으나 中界以後로 오면서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 세가 약해 졌고, 落南이후에는 과거합격자를 거의 내지 못하였다.
    단지 落南祖인 彦濬이 충좌위부사과를 지냈고, 孫子 就礪가 장예원판결사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자 仁達이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한다. 이후 用秋의 문장이 뛰어나 갈문록에 실렸고, 德胤, 宗洛이 문장이 높아 문집이 전함. 특히 宗洛의 호 三素齋는 이 집안의 宗家의 당호와 동일하며 壽職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받았다.
    그리고 병자호란때 의병의 선봉으로 종군한 夢麟, 夢雄 형제의 활약상이 전한다.그러나 안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壬辰亂때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金時敏, 원주목사 金悌甲, 丙子胡亂때의 金應河등이 있으며, 임시정부의 유명한 애국자 白凡 金九先生 이 집안 출신이다.
    안동에 있는 이 집안의 宗家인 三素齋(1674년 건립)는 경상북도 지방민속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안동 김씨의 대종가는 아니나 낙남 이후부터 서애의 외가인 의군 점곡면 사촌의 안동 김씨(도평의공파) 집안과 번갈아 충열공의 향사를 맡아 주도적으로 지내 왔으므로 이후부터는 안동지방뿐 아니라 전국 선김의 중심적 역할을 하여 왔으며 대종회가 결성되면서 부터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특기할 점은 삼소재의 사랑은 槐堂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소산에 있는 대가들은 대문을 거의 설치하지 않고 대문이 들어설 지점에는 檜나무를 심어 그 경계로 삼았다. 이는 檜谷村 (지금 풍산읍 회곡리)의 지명과 아울러 볼 때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